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틴 밴 뷰런 (문단 편집) == 생애 == [[뉴욕주]]의 킨더후크에서 출생. 그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뷰런은 시작은 선술집 주인으로 "보통 사람"이었다. 미국은 신분이 없는 공화정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밴뷰런이 활동했던 당시에는 국가의 주요 요직을 '귀족'이나 다름없는 명문가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마틴 밴뷰런은 그런 점에서는 당대 거물 정치인 [[앤드루 잭슨]]과 함께 '평민'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출신 성분은 그의 정치적 커리어에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 좋아 말솜씨가 좋아 킨더후크의 유명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정규 교육과정은 거친 적이 없다. 어쨌든 그 능력으로 변호사가 되었으며, 그 후 정치에 진출하여 [[민주공화당(미국)|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뉴욕주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815년 뉴욕 검찰 총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완전하게 익히게 되는데, 그런 과도하게 드러나는 "배운 예의범절"이 [[데이비드 크로켓]] 등에게는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1824년 자신이 지지했던 [[앤드루 잭슨]]이 [[존 퀸시 애덤스]]에게 낙선 아닌 낙선을 당하게 되자 강력한 선거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을 정상으로 한 파벌을 만들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현대 정치의 시작이라고 보게 된다. 그가 미국 정치에 남긴 영향으로는 직업 정치인으로서 '[[머신]](Machine)'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머신이란 대중을 투표에 동원하는 촘촘히 구축된 선거조직을 말한다. 이렇게만 보면 멀쩡해 보이는 '머신'이 왜 문제가 되냐면,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중 동원이라는 게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를 떠올리게 하는 금품 살포를 비롯한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머신은 구축과 유지에 큰 비용이 드는 탓에 한 사람이 쓰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후계자가 물려받는 경우가 빈번하고, 따라서 "계파"의 구축과도 친연성이 크다. 그래서 영단어 "머신 폴리틱스(Machine Politics)"에는 부정적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 그 만큼 밴뷰런의 악평도 높은 것. 그리하여 1828년 잭슨이 당선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어 국무장관에 오르게 되었고 1832년에는 [[미국 부통령|부통령]] [[존 C. 칼훈]]이 사직하자[* 그와 절친했던 [[헨리 클레이]]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잭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잭슨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마침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부통령을 역임하고 대통령이 된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 경우를 최초라고 본다.[*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 같은 경우는 당시 선거 제도가 차점자, 즉 [[2등]]을 부통령에 앉히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1837년의 공황이 터지고 만 것. 이 공황의 규모는 [[1930년대]] [[대공황]] 만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공황 발생 전에는 '''사상 최악의 공황'''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말았다. 근데 사실 이건 잭슨 때 연방은행 없에겠다고 뺀 돈을 사은행들한테 넣어놨더니 돈놀이나 마구 하다가 [[거품경제|거품]] 꺼졌는데 영국 자본까지 함께 빠져나가면서 생긴 문제였는지라, 본인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헨리 클레이가 극구 반대하며 협력을 요청할 때도 멍때리고 돕지 않았던게 밴뷰런이었던 지라, 본인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타 국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을 거부하는 등, 화끈했던 전임자 잭슨에 비해 우유부단하게 비춰졌고 이를 두고 [[휘그당]]에서는 그의 이름을 빗대 '''Martin Van Ruin'''(마틴은 폐허를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공세적인 선거를 펼쳤다. 캐롤라인호 사건을 윈필드 스콧 장군을 파견해 미영간의 분쟁을 차단한 것, 제2차 세미놀 전쟁([[인디언 전쟁]]의 일부)을 승전으로 이끌고 [[아메리카 원주민]] 이주 정책을 유지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업적을 세웠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이미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잭슨 밑의 많은 이들도 등을 돌린 상태였고, 결국 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후보분열이 일어나 런닝메이트도 없을 정도였다. 1840년 결국 재선에 실패, [[윌리엄 해리슨]]에게 패하고 백악관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식날 내린 비를 철철 맞으면서 장시간 동안 연설하다가 폐렴에 걸려 취임 한달만에 사망했다. 게다가 68세의 고령이였다.] 사실 선거인단에 비해 선거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고 한다. 127만표 대 112만표. 6.1% 격차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에 도전했고 기어이 1848년에는 독자 출마를 감행하였다. 그가 새로 만든 [[자유토지당]]은 서부개척지를 노예제로 부리지 말고 해방 노예들이 토지를 일구게 하는게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낫다는 개념있는 주장을 했다. 자유토지당은 비록 선거에서는 실패했지만 하원과 상원에서 4년간 의미있는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밴뷰런의 선전 (10% 득표)은 민주당의 표를 일부 갉아먹어 [[재커리 테일러]]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로 자유토지당은 1852년 [[공화당(미국)|공화당]]에 합류하지만 마틴 밴뷰런은 민주당으로 복당하여 죽을 때까지 민주당원으로 남았다. 정계 은퇴 후에는 조용히 살다 1862년 세상을 떠났다. 강력한 노예제 반대입장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어느정도 역할을 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